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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헌 김기수 선생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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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金琪洙)의 아호는 죽헌(竹軒). 후에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고쳐 대마루라 했다. 대마루 김기수는 1917년 11월 22일, 서울 체부동 191번지에서 김영제(金永濟)와 전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의 3남 2녀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해 하모니카를 잘 불었으며,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노래를 잘 불러 창가(唱歌) 성적이 우수했다. 당시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담당했던 이면상 선생은 일찍이 그의 소질을 인정해 '음악의 길로 나가면 대성할 수 있다'고 어린 그의 가슴에 희망을 심어 주었지만, 김기수 자신은 음악을 필생의 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금화초등학교를 졸업한 김기수는 경성농업학교(5년제 중학교)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이왕직(李王職)에 소속된 아악부(雅樂部)에서 관비로 다닐 수 있는 학생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1931년 4월, 15세에 이왕직 아악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아악부 제 4기생이 되었는데, 입학 인원인 18명 가운데에는 평생 고락을 함께 한 장사훈, 김성진 등이 있었다. 


대마루는 2년 동안 일반과목을 두루 거친 후, 3학년 때부터 대금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자신이 전통 악기인 대금을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대금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 긍지를 가졌던 그는, 대금을 들고 다니는 것을 일경(日警)이 총칼 차고 다니는 것 이상의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김기수는 악과(樂科)도 학과(學科)에서 모두 발군의 성적이었다. 1936년 3월, 수석으로 졸업했고 이왕직 아악수(雅樂手)가 된다.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아악과 같이 정간보(井間譜)로 되어 있는 악보를 5선보로 역보(譯譜)하는 일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그는 작곡에 관심을 갖게도 되는데, 1939년 12월 이왕직에서 현상공모한 신곡 모집에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이 당선된다. 이 곡은 이능화(李能和)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친일적인 성향의 작품이다. 


1940년 11월 9일, 아악이습회(雅樂肄習會)에서 '제 97회 특별기념연주회'라는 이름으로, 당시 부민관(府民館)에서 초연되었고, 가창(歌唱)도 그가 맡았다. 이 작품을 현대 국악창작의 효시로 보는데는 종종 논란이 일기도 하고, 주위에서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숨기려 하기도 했다. 


그 한 예로 장사훈이 지은 '국악대사전'에서는, 이 작품과 관련해서 '소위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곡'이기에 생략한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기수 자신은 정작 자신이 이 작품을 썼던 사실에 대해 결코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한 해방 이후 그의 작품에서 민족주의 성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첫 작품에 대한 오명을 씻기 위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서 그는 습작기(習作期)를 거쳐서,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처음 드러낼 수 있었던 작품으로, 1941년에 만든 '세우영(細雨影)'을 꼽는다. 이 곡은 같은 해 10월 아악부 일소당에서 '아악 이습회 제 9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후에 곡명을 '자잘비 아래'로 바꾸기도 했다.


이왕직 아악부에서 큰 활약을 했던 김기수는, 그러나 1942년에 한 가지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단 국악과의 인연을 끊게 된다. 아악부를 그만 두게 된 동기 등에 관해서 평소에 그 자신은 상세한 말을 삼갔으나, 훗날 김천흥의 글 등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시 피리의 명수 이용진의 퇴임과 관련이 있다. 그를 환송하는 모임이 있었을 당시, 선배였던 이주환의 후배인 김기수에 대한 견책이 화근이 되었던 듯 싶다. 아악부에서 극구 만류했고, 사직원이 이왕직에 이첩이 된 이후에도 이왕직 고위층에서 놀라고 본인의 의사를 직접 들어보려했다. 하지만 김기수는 이왕직에 들어가서도 사직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1942년 7월 아악부 아악수직을 자의로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만주 하얼빈으로 홀연히 떠난다. 그는 여기서 동광국민우급학교를 여는등 학교 교육을 통한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약 4년여에 걸친 만주에서의 방황 기간중, 하얼삔시 부사(富士) 초등학교 교사, 안광(安廣) 청년련생소 교관등을 지내고, 만주대학 정치학과 야간부에 적을 두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잠시 귀향해 남정순(南貞順)과 혼례를 치르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는 해방이 된 후에 금강귀국단의 부단장의 자격으로 귀향했다. 서울에 다시 돌아 온 그는 중등학교 교원강습회 국어과를 수료하기도 하고, 상명여고에서 잠시 국악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 후 그는 한영공업 총무부장, 한국생명보험 서울상공조합 총무부장 등을 지내며 인생 편력을 계속했다.


그가 다시 국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였다. 당시 구왕궁(이왕직) 아악부에서는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여 새로운 국립국악원 개원을 서둘러 준비했는데, 이 때 김기수가 다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새로이 갖춘 인사 서류를 갖추어 간부급은 당시 문교부에 보내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악부 서무측에 보관하여 하루 속히 정부의 결정이 내려지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일찍이 아악부의 양악채보 촉탁으로 근무한 일도 있는 이종태(李鍾泰) 대령은, 국군 장병을 위문하기 위한 육군 군예대(軍藝隊)를 조직 파송할 계획을 세우고 아악부의 협조를 의뢰하여 온 것이다. 육군 군예대는 국악대·양악대·연예대등 모두 3개의 소대로 편성되고 있었다. 제 3소대는 국악대로 몇몇의 여성을 제외하고 거의 아악부 소속이었다. 그 대장은 성경린이었고, 대원으로는 김보남, 김천흥, 봉해룡, 김성진, 김태섭과 함께 김기수가 있었다. 


대마루는 1951년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국악사)가 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국악과 인연을 맺어, 국립국악원 장악과 연구계에 적을 두게된다. 이 당시 그의 창작 활동은 새롭게 개화되기 시작하는데, 1952년 한해동안 관현합주곡 '정백혼(精白魂)', 관악4중주곡 '명단풍(明旦風)', 관악합주곡 '송광복(頌光復)', 가악 '개천부(開天賦)', 합악곡 '하원춘(賀元春)'등 5곡의 작품을 창작한다. 


하원춘은 1953년 1월 1일 초연됐으며, 이 해에는 '회서양(會瑞陽)' 1954년에는 '파붕선(破崩線)' 등을 작곡했다. 이것은 이른바 그에 의해서 시도된 '신국악운동'의 발판이 되었으며, 이러한 공로로 1954년 3월 서울특별시 문화상(음악)을 수상했다. 


그는 이보다 앞서 1953년 1월에는 국립국악원 예술관이 되어 국립국악원 장악과장이 되었다. 1959년 4월부터는 새로 개설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단소와 대금 등의 실기를 가르쳤으며, 1962년 1월에는 부학예관으로, 국립국악원 악사장 겸 국악사 양성소 부소장의 위치에 이르렀고, 그 해 문교부, 학술원 제정의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했다. 


1964년 12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1년 2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가 되었다. 1973년 9월에는 국립국악원 최고 책임자인 원장직을 맡는다. 1977년 국립국악원장을 퇴임한 그는, 같은 해 3월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77년 9월 '제22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음악부문 공로상 수상을 했고, 1979년 10월 '제1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부문상을 수상했다. 그가 예술원의 정회원이 된 것은 1983년 8월이며, 1985년 10월 21일 타계했으며,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서훈.됐다. 


대마루(竹軒)의 삶은 크게 둘으로 나누어서 살필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교육자로서의 삶이다. 평생 국악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던 그는, 생전에 자신이 가장 바쁘게 또 보람있게 보낸 시절이 1955년 '국악사양성소' 설립 당시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주환, 성경린 등을 도와 국악사양성소 설립 작업에 동분서주한 그는 특히 국악교재 마련 때문에 갖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예산이 모자라 교재를 인쇄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그는 손수 필경을 하고 등사를 해서 교재를 만들곤 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장학과장'이었던 그는 한때 '등사과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금, 단소, 거문고, 가야금, 해금, 피리, 성악 등의 교본을 직접 집필 등사 제본을 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가야금정악, 현금정악, 해금정악, 피리정악 등의 교재를 공저로 간행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다. 이렇듯 정악의 악보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던 대마루가 특히 힘썼던 것은 국악기의 시김새(장식음)을 정확히 채보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정가풍의 노래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이것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그에 의해서 '한국적인 시창' 교재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은 엄격히 고수하되 그것을 근본 삼아 새롭게 새 시대의 감정에 부합될 수 있는 새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이런 노래들은 그의 옛 시조에 대한 연구를 바탕에 두고 있는데, '고가신조(古歌新調)-대마루 77'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동문선' 등의 문집에서 시조가 아닌 일반시를 번역해 거기다 또 곡을 붙여 '속.고가신조(續古歌新調)- 대마루 99'를 출간했고, 1983년에는 현대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힌 세번째의 단가집 '대마루 소곡집 3 - 높은 하늘'을 엮어냈다.


김기수의 음악과 삶에서 본령이라면 역시 작곡가로서의 삶일 것이다. 잔술한 바와 같이 김기수는 음악적 성숙도에 있어 '세우영(細雨影)-자잘비 아래'를 자신의 작품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 작품은 1941년 8월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 여행기념으로 쓰여진 곡이다. 국악 창작의 최초의 실내악곡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대금, 거문고, 아쟁, 장고로 편성하여 3장으로 구성한 4중주곡이다. 아쟁은 전통적 연주법인 활을 사용하는 주법 뿐만 아니라 피치카토 주법도 사용하고 있다. 또 거문고에서의 개방현(開放絃)의 응용방법이라거나 장고의 장단 변화가 다양해졌다는 사실은, 당시 작곡자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평가할 수 있다. 작곡자가 대금을 전공했기에, 이 곡에서 전통적인 정악풍의 선율에 근본을 둔 대금의 선율이 돋보이며, 이에 따라 곡 전체적으로 대금이 중심이 된 반주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제 1장에서 느린 속도(10/4박자)로 4마디의 대금선율이 서주로 제시되며 이어서 거문고, 아쟁, 장고가 등장해 대금의 여운을 지속음과 장단으로 여백을 채워간다. 제시부격인 좀 빠르게 (10/4박자)는 3+2+2+3, 4+4+2, 5+5등의 다양한 리듬형태로 되어 있고, 이에 바탕을 둔 선율의 진행은 자잘비(細雨)속에 부여의 모습을 고풍있게 그려내고 있다. 

 

제 2장은 보통 속도로 (6/4박자) 적막속의 백제의 화려했던 옛모습과 당시 일제하의 상황이 엉킨 듯 숙연한 느낌을 나타낸다. 그러나 쓸쓸함과 숙연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무한한 잠재의 민족의 힘이 함께 하는 끈질긴 근성의 선율이 함께하는 악장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타령 장단의 변형을 주축으로 하는 제 3장은 과거의 찬연함 속에 무궁한 민족의 번영과 희망을 담은 듯 도약적인 힘이 넘치는 악장이다.


국악과 결별했던 만주 시절에도 그는 창작곡을 만들었다. 1944년에 만든 관현악곡인 '고향소(顧鄕訴)'가 바로 그런 작품으로, 국악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1950년대에 쓴 작품은 대개 국가 행사와 유관하다. 김기수의 작품 가운데서 이후에도 정부기념일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품은 송광복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을 가리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새로운 악장(樂章)'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악기 편성은 대편성으로 소금, 대금, 퉁소, 피리Ⅰ,Ⅱ, 해금, 아쟁, 양금, 가야금, 거문고, 운라, 편경, 편종, 장구, 좌고로 되어 있다. 


제 1장은 '상쾌하고 활기있게'라는 표제에 6/4박자로 조금 빠르게 연주하게 된다. 대금, 피리의 활기 있는 선율에 현악기가 선율 끝을 받는 8소절의 제시적인 선율로 시작된다. 6/8박자의 빠르게와 4/4, 6/8박자 변화는 활동적이고 생기있는 모습을 더 해 광복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제 2장은 '힘있고 정열적으로'라는 표제에 4/4박자의 보통 속도로 관악군(管樂群)의 힘찬 선율에 현악군(絃樂群)의 힘을 가세하면서, 겨레의 뭉쳐진 힘과 정열을 3연음부선율로 엮어나가고 있다. 

 

제 3장은 '고난을 이겨내어 되찾은 조국광복의 환희를 노래하는 악장'으로 6/4박자의 빠른 속도는 힘차고 화려하게 낙원의 조국건설과 민족의 영원함을 목높여 외치는 환희의 악장이다.


정백혼은 1952년 2월에 작곡되어 그해 3월 부산진 삼장사(三莊祠) 제향에서 이왕직 아악부에 의해 초연되었고 정부 수립후 3.1절 기념 음악회때에도 연주된 작품이다. 일제시대의 민족의 아픔을 작품화한 곡으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성악기는 소금, 대금, 피리, 해금, 아쟁, 가야금, 거문고, 장구이다. 


제 1악장은 '파민(破民)의 꿈트림'. 임종계면조로, 일제시대 민족의 비참함과 울분을 나타내고 있다. 

 

제 2악장은 '절규와 탄압'. 황종평조로 3.1운동의 항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 3악장은 '겨레의 비애'. 황종평조로 광복전의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제 4악장은 '불멸의 넋'. 역시 황종평조로 광복후의 감격과 희열에 넘친 환희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개천부(開天賦)는 1952년에 작사, 작곡하여, 그해 10월 3일 국립국악원이 초연하였다. 이 곡은 우리 나라를 세운 성스러운 뜻을 기리는 곡으로 곡 전체를 평조(平調)로 한다. 


서엽(序葉)은 장엄하고 느리게 초장은 정중하고 퍽 느리게, 

 

2엽(貳葉)은 경건하고 느리게, 

 

3엽(參葉)은 희망에 차고 보통 속도로 등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단 구성위에 선율은 전통적인 악장(樂章)의 창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5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 가운데서, 작곡가 자신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으로는 하원춘을 꼽는다. 전 3악장으로 된 이 곡에서 


제 1악장인 동명(東明)은 힘차게 솟아오르는 새해 아침의 태양처럼 온 겨레가 힘차게 일어나는 모습을 묘사하려 한 부분이다. 

 

제 2악장 개운(開雲)에서는 구름 걷힌 푸른 하늘과 같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예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3악장인 서광(曙光)에서는 온 겨레가 큰 희망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제목들은 상징적인 의미만을 띠고 있으며, 이것을 묘사 음악적인 기법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953년 작품인 회서양은 '다시온 서울'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며, 


제 1장은 장쾌한 환향, 

 

제 2장은 미려한 평화, 

 

제 3장은 발랄한 부흥, 

 

제 4장은 약진보(躍進步)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그에게는 귀향(歸鄕)의 감동을 읊은 두 편의 관현악곡을 작곡했는데, 그 첫 곡이 1944년에 만든 고향소가 해당되며, 또하나가 바로 이 회서양이다. 그러나 작곡가는 귀향을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민족정신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특징이라 하겠다. 


환도후 1954년 광복절 서울 시공관에서 발표된 '파붕선'은 '통일'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며, 그는 여기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의지를 대편성의 관현악을 통해서 소리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황화만년지곡을 썼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그의 초기작품은 주로 대편성의 관현악곡이었고, 이것은 이후 1960년대에 보다 활발하게 되는 국악관현악단의 편성의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기수는 1961년경부터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창작활동이 전개되기 전까지, 독보적인 위치에서 국악 창작계를 이끌어 간 유일한 개척자로 군림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에는 김기수는 국악의 전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내용과 형식, 편성의 창작곡을 쓰고자 힘을 기울였다. 이후의 관현합주곡으로 새동산(69), 마파람(69), 허튼가락 새가락(71), 그론텔드마잘의 인상(73), 신개지(74), 뿌리깊은 나무(76), 무궁한 등불(77)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의 작품으로 주목할만 한 것은 신개지(新開地). 소금, 단소, 대금, 피리, 해금, 아쟁, 박, 장구, 좌고, 운라, 편경, 편종, 양금, 가야금, 거문고, 축, 징, 바라, 꽹과리, 어 등 전통적 관현합주 보다 훨씬 큰 규모의 악기편성을 통해, 작곡가가 관현악편성을 통해서 일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작풍(作風)을 한층 웅장하고 세련되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대마루는 행진음악에 해당하는 취타곡(吹打曲)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작품들은 61년, 77년, 82년 등에 걸쳐서 만들었는데, 신작로(新作路) 행군(行軍) 여명(黎明) 승리(勝利)를 시작으로 해서, 탄탄(坦坦) 승승(勝勝) 양양(洋洋) 등으로 작품이 심화되었다. 이들 작품들의 일부는 과거 육군본부 군악대 내의 국악대를 거쳐, 지금도 '국방부 군악대'에 소속된 '국악대'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고 있다. 


김기수가 만든 독주곡으로는 57년에 만든 대금독주곡 '해월(海月)'을 시작으로 가야금독주곡 '향란(香蘭)', 대금독주곡 '설죽(雪竹)', 피리독주곡 '가람', 해금독주곡 '등롱'(원명은 초롱)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무용극 음악으로 '내마음의 전설' '처용랑' '만파식적' 등을 작곡했다. 이외에도 제례악 계통의 행사음악으로 '현충다례악' '춘향제례악'등이 있으며, 판소리에 바탕을 둔 창극음악인 '춘향전' '강감찬 장군' 등도 만들은 바 있다. 


김기수의 창작 방향의 본질은 궁정 아악의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다 작곡가가 거의 독학으로 민속음악이나 서양음악을 학습해 가면서 민속적인 리듬이나 양악적인 관현악법을 흡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서 초창기의 현대 국악이 구축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김기수가 지향한 창작음악은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창작음악은 '시대(時代)의 국악'이요, '장대(壯大)한 국악'이란 말로 집약하여 설명이 가능하다. 


김기수의 음악을 '시대의 음악'이라 함은 앞서 살핀 1950년대에 발표된 작품의 표제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곧 그는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민족음악을 통해서 민족정기를 고취하려는 의도하에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고향소', '정백혼', '송광복', '회서양', '파붕선', '5월의 노래', '8월의 노래' 등이 모두 우리의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새나라(62), 새아침(65), 새동산(69), 신개지(74), 새마음(78) 등도 당시 증산 수출 건설 등을 목청 높였거나,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던 당시 사회의 슬로건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장대한 국악이라 함은 그의 악기편성과 관계깊다. 그는 국악이 현대에 있어서의 전달 장소인 극장 형태의 연주회장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청중들에게 수용되기 위해서 악기의 가짓수를 늘리고 악기의 음량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마루는 대편성의 국악관현악곡을 주로 써왔으며, 이전에는 향악기니 당악기니 하는 명칭 아래서 같이 쓰이지 않았던 모든 악기들을 하나의 국악관현악곡 안에 함께 등장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의 악곡중에서는 음량 증가와 음역 확대를 위해서 피리를 길게 만든 '대피리'나 아쟁의 크기와 줄을 늘린 '대쟁'과 같은 새로 만든 악기가 동원되는 경우도 보인다. 따라서 그의 관현악곡은 아악의 어법을 밑바탕에 두면서 음량과 음색이 다양하기 때문에 웅장하고 장려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감상할 수 있다. 


김기수를 창작음악의 효시로 보는 국악작곡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그가 국악작곡을 하는데 있어서, 오선보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든지 악상기호나 빠르기표 등을 서양음악의 그것에 따랐다든가, 아니면 전통음악의 집박을 대신해 지휘개념을 도입하였다는 등, 주로 서양음악적 사고와 관련하여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를 창작관현악의 선두주자로 볼 수 있는 평가는 이런 당시 시대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던 외래 음악적 요소에서 찾기보다는, 한국음악의 내재적 발전과정에서 찾는 것이 보다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대마루를 그의 호와 같이 명실공히 국악창작의 태두(泰斗)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왕조의 궁정악사를 양성하는 이왕직 아악부원으로 음악인생을 시작했으나, 기존의 전통음악의 연주에만 만족하지 않고 진보적인 신념을 가지고, 당시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힘썼으며, 작품의 내용적 측면과 음악의 악기편성 내지 형식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가 창작한 작품속에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힘차게 뻗어나가는 웅비에 찬 대편성 관현악곡을 선호했고, 거기에 더하여 대피리나 대아쟁 등의 저음부를 보강하여 보다 웅장한 음악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김기수의 말기의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1984년에 만든 '청사포 아침해'. 청사포는 부산에 있는 해운대 너머 송정리에 이르는 광할한 개활지의 지명이며, 이 작품은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위촉작품. 여기서 작곡가는 묘사음악적인 시도를 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이전의 대개의 작품이 민족적인 성향을 띤 작품을 대편성의 국악관현악곡으로 일관했음에 반해, 부산 앞바다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뱃고동 소리를 올리며 떠나는 모습 등을 매우 정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작곡가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 관현악으로 표현된 낭만주의적 심성을 읽게 하는 귀중한 작품이며, 작곡가의 변모된 모습 내지 작곡가의 음악적 심성 속에 내재된 또 하나의 모습이 새로이 발견되는 작품이다. 


김기수의 마지막 작품은 당굴(檀君). 당굴은 단군의 고유어적인 표현이다. 이 작품은 3악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마늘 쑥 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대마루가 돌아가기 한 해 전인 85년 8월에 완성한 작품으로,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초창기의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작품들의 연계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작곡가 자신의 작품 노트에는 '당굴은 국조 단군왕검이시다. (중략) 소재는 건국신화에서 택했으나 취향은 번영과 도약과 환희의 미래지향적 상징에 무게를 두었다. (하략)'라고 적혀 있다. 


당굴의 음악속에는 태백산 높은 봉우리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단군의 모습을 그려보게도 되고, 또 인생의 절반을 후진양성을 위해 몸바쳐 당시 국악고등학교가 있던 목멱산(남산)을 아침저녁 오르내리던 선생의 꼿꼿한 걸음새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말하여 진다.


이 작품은 김기수의 평생 작품을 총결산하는 작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한마디로 김기수에 의해 시작된 민족주의(국민주의) 음악의 내용과 형식이 총 결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마루 김기수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책상에 앉아서 국악과 민족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또 정간보나 오선보의 악보를 만들거나, 작품을 쓰는 모습 외에,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거나 오락으로 소일하는 등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는 집에서도 난초 화분에 수석 한 점을 올려 놓여진 낮은 책상을 앞에 두고, 늘 국악과 관련된 일만을 했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취미라면 서예였다. 또한 의지력이 강했던 그는 45세경 술과 담배를 끊고 다시 입에 대지 않았다.


대마루의 말년의 꿈은 '국악 유치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국악의 조기교육을 서둘러 일찍부터 국악의 인재를 길러내고, 이렇게 되면 국악의 저변 확대는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국악기도 그 크기가 작은 '베이비 가야금', '베이비 대금' 등의 작은 크기의 악기를 개발하여,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보급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새것을 찾으려거든 전통을 더 깊이 파라." 이것이 그의 음악 철학이었으며, 또한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해서 전통을 정리하는 수많은 음악교본과 또한 이런 전통에 바탕을 둔 수많은 창작곡을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중강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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