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박용호 선생님의 말씀 (1)|
풍류회 지도고문이신 김방현 선생님 대금협연을 구경하고 박인호 회원과 뒤풀이에 갔었습니다.
뒤풀이 장소에서는 많은 유명 국악인들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 중 대금 명인 박용호 선생님과 함께 자리를 하고 오랫동안 담소를 나눈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다음은 박용호 선생님의 녹취록입니다. 녹음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증언입니다.
---===---
저는 이 나이까지 대금을 해 오면서 많은 음악을 접하고 살아 왔습니다. 어려서 양성소 생활을 했고, 이미 그 때부터 집안이 어려워 살림 까지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요,,
그 때는 음향시설이 없었는지라, 많은 행사에서 생음악을 써야했는데,, 무용 반주같은 것은 수시로 있었으나, 당시 서울에서 무용반주를 맡을 만한 팀,, 우리는 이걸 구미라고 불렀는데요, 이게 모두 다섯구미를 넘지 않았습니다. 지영희, 김광식, 서공철 이렇게 한 구미, 또 아무개 아무개,,,
실정이 이렇다보니, 수요는 많고 공급은 달리고, 나같은 학생신분일지라도 잘 팔려 다녔지요,,
그 때 하던 음악은 주로 무용반주 민요 산조 같은 음악이었는데 나는 국악사 양성소를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따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그 때 김기수 선생님이 나를 볼 때 마다 늘 말씀하셨습니다.
" 네 이놈 그 따위 산조나 삑삑 불고 민요 나부랑이나 불어제끼고 당장 그만 두거라,,"
그 때는 음악에 대해 지금과 생각하는 게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늘 볼 때 마다 똑같은 말씀이셨습니다.
신쾌동 선생하고도 같이 다녔는데 의외로 신쾌동 선생이 일거리를 잘 가져 옵니다. 그런데 그때 마다 신쾌동 선생은 꼭 저하고 같이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신쾌동 선생은 거문고 연주자 인지라, 무용반주 같은 음악을 한게 아니고, 무슨 행사 같은데에 가서는 꼭 풍류를 한 프로 하고 선생이 거문고 산조를 연주하고 했습니다. 때문에 풍류를 함께 연주하고 산조도하고 할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당시에는 정악하고 산조를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나이 어렸지만 늘 신쾌동선생이 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